🎵 절대음감과 상대음감 – 작곡가에게 정말 중요한 감각은 무엇일까요?
‘절대음감이 없으면 작곡하기 어려운가요?’
음악을 처음 공부하거나, 자녀의 음악 교육을 고민하시는 분들께 종종 듣는 질문입니다. 절대음감은 흔히 ‘음악 천재의 조건’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음악의 실제 세계는 그보다 훨씬 다채롭습니다. 이 글에서는 절대음감과 상대음감의 차이, 클래식 작곡 입시에서의 현실, 그리고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까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절대음감 vs 상대음감, 무엇이 다른가요?
먼저 용어부터 정확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절대음감이란 외부 기준이 없이도 음을 들으면 곧바로 그 음이름(C, D, E 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구급차 사이렌 소리를 들었을 때, 그 음이 ‘미–도–미–도’처럼 고정된 이름으로 들리는 것이죠.
반면 상대음감은 기준음에 비해 다른 음이 얼마나 높은지 혹은 낮은지를 구분할 수 있는 감각입니다. 도를 들은 상태에서 미가 들리면 ‘장3도 위’라는 식으로 파악하게 됩니다.
절대음감이 있으면 시창청음이나 즉흥적인 음정 파악에 유리할 수 있지만, 음악 전체의 흐름을 읽고, 전조나 구조를 이해하며 따라가는 데에는 오히려 상대음감이 더 유연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음감이 아니었던 작곡가들
역사상 수많은 위대한 작곡가들이 절대음감 없이도 불멸의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예를 들어,
로베르트 슈만: 아내 클라라의 회고에 따르면 절대음감은 아니었으나, 화성과 구조에 대한 감각이 매우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음악은 감성적 직관과 이성적 설계가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공식적으로는 상대음감형 청음 능력을 지녔으며, 탁월한 청각적 기억력과 직관적 작곡 능력으로 수많은 교향곡과 실내악을 완성했습니다.
이처럼 작곡에 필요한 감각은 단순한 ‘절대적인 음 인식’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조를 설계하고 기억하는 능력, 그리고 음악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시야에서 비롯된 감각 역시 작곡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저의 이야기 – 음악을 ‘느낌’과 ‘설계’로 바라보다
저는 절대음감이 없습니다. 구급차 소리를 들어도 그 음이 무엇인지 단번에 인식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찬송가를 자주 연주하면서, 누군가 따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런 감각들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곡은 이 조성이구나.”
“곡이 끝날 때는 이런 화성 진행이 나오는구나.”
“이 곡을 전조해서 더 높은 음역이나 낮은 음역으로 바꿔 연주할 수 있겠구나.”
이런 식으로 곡을 자주 접하고 연주하다 보니, 조성과 화성의 흐름, 성부 간의 역할까지도 몸으로 익혀졌습니다.
특별히 외우지 않아도 전조할 때 어떤 음이 바뀌고, 어떤 화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지를 감으로 알 수 있었죠.
이렇게 쌓인 감각은 단순히 음을 인식하는 능력과는 다른 것이었고, 나중에 곡을 쓰거나 편곡할 때도 음악의 방향을 미리 그려볼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클래식 입시에서 정말 중요한 감각은?
사실 클래식 작곡 입시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과목 중 하나는 시창청음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들려주는 멜로디나 화음을 정확히 기억하고 악보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절대음감을 지닌 학생들이 유리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저 역시 이 과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늘 부담이었고, 실제로 시창청음 성적이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입시를 준비할 때는 시창청음 시험이 아예 없는 학교들을 중심으로 전략을 세우고, 대신 작곡이나 화성학처럼 제 감각을 잘 발휘할 수 있는 과목에 집중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런 과목에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저에게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진학을 결정할 수 있었죠.
작곡 시험은 보통 3시간 안에 피아노곡을 완성해야 하는 형식인데, 이때는 악기나 컴퓨터 없이 오직 종이와 펜만으로 작곡을 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정확한 음 인식’이 아니라, 머릿속에 쌓여 있는 ‘화성적 기억’과 ‘음악 구조에 대한 이해’입니다. 기억해둔 화성 진행, 자주 접하며 익혀온 구조적 패턴, 그리고 다양한 표현 방식의 감각이 모여 주어진 주제에 맞는 곡을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세부가 아니라 전체를 그려내는 설계 감각이죠.
물론 절대음감이 있는 사람은 작곡 과정에서 상상한 음의 높낮이를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음을 옮기고 악보에 기록하는 데 강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음감을 지닌 사람도 조성과 화성의 흐름을 구조적으로 파악하고, 그 감각을 기반으로 전체 곡을 설계해나갈 수 있기 때문에 작곡 능력에서 결코 뒤처지지 않습니다.
🌿 마무리하며
절대음감은 분명히 탁월한 음악적 재능입니다. 정확한 청음이 필요한 상황이나 빠른 음정 파악이 요구되는 환경에서는 큰 장점이 되죠. 하지만 그것이 음악의 전부는 아닙니다.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는 ‘정확히 듣는 기술’뿐 아니라, ‘깊이 이해하고 설계하는 감각’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감각은 타고난 절대음감이 아닌, 오랜 시간 음악을 경험하고 반복하며 축적된 기억과 구조 감각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상대음감은 바로 그 구조를 기억하고 조화를 이해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결국 음악은, ‘나만의 방식으로 듣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과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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