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듣는 음악의 구조는 단지 멜로디만이 아니라, 소리들이 어떻게 어울리는가에 따라 다채로운 인상을 줍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화성’과 ‘조성’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음악에서 화성과 조성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시대별로 정리하고, 각 시대를 대표하는 감상곡을 함께 소개합니다.
🕯 중세 – 선율의 신성함과 단선율의 시대
중세는 음악이 종교와 깊이 연결되어 있던 시기로, 하느님의 뜻을 경건하게 전하는 것이 음악의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화성이나 조성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으며, 음악은 단선율(모노포니, monophony) 양식이 중심이었습니다. 곡은 하나의 선율로 구성되었고, 반주나 화성의 개입 없이 목소리만으로 노래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음악은 고대 그리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발전한 선법(mode) 체계를 따랐습니다. 선법은 오늘날의 장조·단조 체계와는 다른 구조로, 각각의 모드는 고유한 음계 구조와 종지법을 가지고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습니다. 피타고라스 음률에서 비롯된 7음 체계는 중세에 이르러 8개의 교회 선법으로 정리되었으며, 이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같은 성악 중심 음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 자세한 내용은 나무위키 - 교회선법을 참고하세요.
🎼 중세 화성·조성의 특징
- 단선율(모노포니) 중심
- 교회 선법 사용 (도리아, 프리지아, 리디아 등)
- 협화음정(4도, 5도, 8도)에 대한 이론적 기초 형성
- 조성 개념 없음종지(마침)의 방향성만 부분적으로 존재
🎧 감상: Gregorian Chant : Dies Irae (그레고리안 성가 : 진노의 날)
(YouTube Adoration of the Cross 채널 제공)
중세 말기에 등장한 진혼 미사곡의 선율로, 단선율로만 이루어진 구조 안에서도 극적인 긴장감을 전합니다. 이후 수많은 작곡가들이 인용한 상징적인 선율입니다.
🌿 르네상스 – 다성의 조화와 3화음의 기원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 중심의 사고가 확산되며, 음악 역시 감정과 아름다움의 표현을 중시하게 됩니다. 음악은 더 이상 단순히 신의 뜻을 전달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감성과 예술적 정교함을 담는 방식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시기 음악의 중심은 다성음악(폴리포니, polyphony)으로, 각 성부가 독립적이면서도 조화롭게 얽히는 구조가 특징입니다.
화성과 조성 개념은 아직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선법(mode)이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3도와 6도 음정의 사용이 늘어나면서 점차 협화음의 개념이 강화됩니다. 다양한 성부가 이루는 음향 속에서 자연스럽게 3화음 형태가 나타났고, 종지감에 대한 의식도 강화되면서 조성 개념의 기초가 마련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오늘날과 같은 기능화성 체계(I–IV–V)는 본격적으로 정착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 르네상스 화성·조성의 특징
- 폴리포니 양식 확립
- 여전히 선법 기반이지만 조성적 성향 증가
- 협화음정(3도, 6도)의 빈도 증가
- 종지 구조 정립 (완전종지 등), 그러나 기능화성 체계는 정착되지 않음.
- 화음보다 선율 중심 사고
🎧 감상: Stile Antico - Josquin des Prez: Ave Maria, Virgo Serena (조스캥 데프레 : 아베 마리아)
(YouTube Stile Antico 채널 제공)
르네상스 다성음악의 대표작으로, 각 성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선율과 화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조성은 명확하지 않지만 3화음의 형태가 등장하고 종지감도 있습니다. 곡 전개에서 긴장과 해소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 바로크 – 조성의 탄생과 기능화성의 기초
바로크 시대는 음악이 극적인 표현과 질서 있는 구조 속에서 발전한 시기로, 오늘날 우리가 아는 장조·단조 조성 체계가 본격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기능화성 체계의 확립으로, '주3화음(으뜸화음(I), 버금딸림화음(IV), 딸림화음(V))'이 중심이 되어 음악이 구조적으로 전개됩니다.
특히 속화음(V)에서 주화음(I)으로 해결되는 전형적인 진행(I–IV–V–I)은 긴장과 이완의 흐름을 명확하게 만들어 곡의 구조적 안정감을 높였습니다. 이러한 진행은 카덴차(종지)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하며, 곡의 문장을 마무리하는 핵심 원리로 자리잡았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통주저음(basso continuo)의 활용으로, 숫자 저음(figured bass)을 통해 화성을 기보하고 연주자가 즉흥적으로 반주를 완성하는 방식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 바로크 시대의 화성·조성의 특징
- 장조·단조 조성 체계 확립
- 기능화성의 원형(I, IV, V 화음) 등장
- 전조 가능성 확대
- 통주저음(Basso Continuo) 사용
- 수직적 화성 감각의 강화.
🎧 감상: 비발디 사계 '봄' - 클라라 주미 강 & 드레스덴슈타츠카펠레
(YouTube 달빛소나타 채널 제공)
명확한 조성과 반복되는 리토르넬로 형식, 그리고 선명한 기능화성 구조를 통해 바로크 음악의 전형적인 화성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 감상: J. S. 바흐 |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WV 1043 | J. S Bach | Concerto for Two Violins in D minor, BMV 1043
(Violin | 윤동환 Dong-Hwan Yoon, 슐로모 민츠 Schlomo Mintz // Players | 바흐 콜레기움 서울 Bach Collegium Seoul)
(YouTube 한경arteTV 채널 제공)
복잡한 폴리포니와 안정된 조성 체계가 결합된 작품으로, 바로크 화성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 고전주의 – 균형과 명료함의 조성
고전주의는 음악의 구조적 완성도와 조화로운 균형을 중시한 시기로, 기능화성 체계가 정점에 이른 시기입니다. 장조·단조 조성을 바탕으로 하는 화성 진행이 더욱 정형화되었고, 으뜸화음(I), 버금딸림화음(IV), 딸림화음(V)을 중심으로 한 기본 화성 틀이 철저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음악은 소나타 형식을 중심으로 발전하며, 주제의 전개와 조성의 대비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조성은 명확하게 제시되며, 전개부에서는 일시적으로 다른 조성으로 전조되었다가 재현부에서 다시 원조로 돌아오는 구조적 흐름을 통해 긴장과 이완이 효과적으로 표현됩니다. 화성은 간결하고 예측 가능하게 구성되어, 청자에게 안정감과 명확한 방향성을 전달합니다. 전체적으로 고전주의 화성은 질서, 대비, 균형이라는 음악적 이상을 실현하는 핵심 도구로 작용했습니다.
🎼 화성·조성의 특징
- I-IV-V-I 중심의 기능화성 완성
- 조성의 명확한 구분(주조, 딸림조, 관계조 등)
- 화성 진행의 규칙성과 반복
- 카덴차(종지)의 전형화전조 구조의 일관성
🎧 감상: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6번, K.545 :: W. A. Mozart :: Piano Sonata No.16, K.545
(피아니스트 손열음 연주, YouTube TomatoClassic 토마토클래식 채널 제공)
소나타 형식에 기반한 고전주의 조성 체계를 교과서처럼 보여주는 작품으로, 안정적이고 명료한 화성 진행이 특징입니다.
🎧 감상: Haydn String Quartet No. 53 in D Major, Op. 64. - "The Lark"
(LARK Quartet 연주, YouTube LARKQuartet 채널 제공)
주제와 화성의 정교한 구조, 형식미의 완성도를 느낄 수 있는 곡으로, 고전주의의 조성 원리를 가장 이상적으로 반영합니다.
🌹 전기 낭만주의 – 감정의 확대와 반음계의 활용
전기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의 형식미를 바탕으로 감정의 표현이 극대화된 시기로, 조성과 화성 체계는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그 활용 방식은 더욱 유연하고 풍부해졌습니다. 슈베르트, 슈만, 쇼팽과 같은 작곡가들은 내면의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전조를 자주 사용했으며, 화성 진행도 예측을 벗어난 방식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화성은 여전히 기능 중심(으뜸–버금딸림–딸림)의 틀 안에 있으나, 단기적인 전조, 관계조 외의 이조, 감7화음이나 반감7화음 등의 도입, 반음계적 진행이 활발하게 사용됩니다. 이를 통해 모호한 긴장감과 감정의 파동을 그리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 화성·조성의 특징
- 전조의 빈도 증가 (관계조 이상의 다양한 전조 시도)
- 반음계적 화성 진행의 사용
- 감7, 반감7 화음의 도입과 확산
- 기능화성 유지 속에 예외적인 진행이 등장
- 조성의 경계를 흐리는 감정 중심 접근
🎧 감상: 슈만: 트로이메라이(R. Schumann: Träumerei)
(피아니스트 임윤찬 연주, YouTube GS칼텍스 예울마루 채널 제공)
이 곡은 간결한 구조 안에 반복되는 주제와 전조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장조로 시작하지만 중간에 내림가장조로 잠시 이조되며, 다시 원래 조로 회귀합니다. 전조의 방식은 전통적이지만 매우 부드럽고 감성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전기 낭만주의의 화성적 유연성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 후기 낭만주의 – 화성의 확장과 해체
후기 낭만주의는 전기 낭만주의의 감성적 화성 언어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시기로, 조성과 화성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말러, 브루크너, 바그너 등의 작곡가들은 매우 확장된 오케스트라 편성과 함께 화성적 긴장, 불협의 미학, 조성의 지연과 해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특히 바그너는 기존의 기능화성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화성을 구성하였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증4도(augmented fourth)를 사용한 '트리스탄 화음'입니다. 중세 시대에는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악마의 음정)이라 불리며 금기시되었던 증4도가, 이제는 긴장과 열망을 상징하는 핵심 음정으로 작품의 서두부터 강조됩니다.
🎼 화성·조성의 특징
- 조성의 모호화
- 무조성의 전조 현상
- 반음계적 전조와 파격적 화음 전개
- 종지 불분명, 해소 없는 긴장감
- ‘색채화성’의 확대 (예: 증6화음, 감7화음 등)
🎧 감상: Wagner | Prelude and Liebestod from Opera ‘Tristan and Isolde’ | 바그너 |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
(박영민 Park Young-Min 지휘, 원주시립교향악단 Wonju philharmonic Orchestra 연주, YouTube 한경arteTV 채널 제공)
작품의 시작부터 등장하는 트리스탄 화음은 이 작품의 핵심입니다. 증4도(트라이톤)는 중세에서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로 금기시되었던 음정이지만, 여기서는 해소되지 않는 긴장을 지속적으로 유발하는 중심 화음으로 사용됩니다.
🎧 감상: Liszt: Harmonies poétiques et religieuses, S. 173: VII. Funérailles
(피아니스트 Krystian Zimerman 연주, YouTube Universal Music Group 채널 제공)
장례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어둡고 격정적인 감정이 펼쳐지며, 극단적인 반음계 전개와 무조에 가까운 화성 구조를 보여줍니다.
💧 인상주의와 20세기 초 – 조성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
드뷔시와 바르톡은 기존의 장단조 조성 체계에서 벗어나, 음계와 화성 구조에 있어 다양한 실험을 시도합니다. 선법 회귀, 전음음계, 5음음계, 12음 기반 등 새로운 어법을 통해 음악은 점차 조성의 해체를 향해 나아가며, 낯설지만 조화로운 음향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 화성·조성의 특징
- 조성의 해체 또는 대체 (선법, 전음음계 등)
- 병행화음, 4도·5도 화성 사용
- 비기능 화성 진행
- 리듬과 음색 중심의 구성
- 대위법의 회귀
🎧 감상: Claude Debussy: Images (Book 1)- Reflets Dans L'eau
(피아니스트 Marc-André Hamelin 연주, YouTube CBC Music 채널 제공)
물의 반사와 빛의 흔들림을 화성적 색채로 표현한 인상주의 대표곡입니다. 병행화음과 전통적 기능화성의 회피, 전음음계, 오스티나토 리듬이 사용되며, 명확한 종지 없이 흐름이 이어지는 구조가 특징입니다.
🎧 감상: Bartok – Music for Strings, Percussion and Celesta, Sz. 106 (바르톡 - 현과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마르쿠스 슈텐츠 지휘, 서울시립교향악단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연주, YouTube 채널 제공)
20세기 초 선법과 리듬 실험이 극대화된 곡으로, 기능화성 없이 구성된 음향적 대비, 불협화 중심의 음색 조합, 비대칭적 리듬이 인상적입니다. 구조적 실험과 현대음악의 전환점을 모두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 현대 – 조성 이후의 음악
현대 음악은 조성 체계를 완전히 해체하고, 구조적 자유와 작곡가의 개성에 따라 다양한 화성 언어를 형성합니다. 무조성, 음렬주의, 전자음악, 민속 음악과의 융합, 그래픽 악보, 우연성 음악 등 실험적 시도가 본격화되며, 음악은 더 이상 ‘조화’가 아닌 ‘탐구’의 예술로 나아갑니다.
🎼 화성·조성의 특징
- 조성 완전 해체 (무조, 음렬주의 등)
- 전통적 화성 기능 제거
- 음색 중심의 구성
- 개성적 체계의 등장 (개인 화성 언어)
- 다문화적 융합
🎧 감상: Isang Yun - Réak (윤이상 - 예악)
(정명훈 지휘, KBS 교향악단 Symphony Orchestra 연주, YouTube KBS클래식 Classic 채널 제공)
《예악》(1961)은 윤이상이 동양 철학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관현악 곡입니다. 전통적인 멜로디 대신, 소리의 색깔과 움직임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조용함과 긴장이 번갈아 흐릅니다. 서양 악기로 한국적인 느낌을 담아낸 독특한 작품입니다.
맺음말
이처럼 음악사의 흐름 속에서 화성과 조성은 고정된 체계가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되어 왔습니다. 단순한 기능적 역할을 넘어서, 이제는 소리 자체의 미학과 철학을 담아내는 표현의 도구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이해한다면, 음악이라는 언어를 시대를 초월해 더욱 깊이 있게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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