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케스트라를 그리는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은 종종 “색채의 작곡가”라고 불립니다. 이는 단순한 수식이 아니라, 그의 음악이 실제로 팔레트와 붓을 든 화가의 작업처럼 정밀하고 섬세하게 조율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피아노곡 하나를 써도 마치 수채화를 그리듯 음색을 쌓고, 관현악을 편성할 때도 색채와 밀도의 균형을 끊임없이 계산했습니다.
오늘은 그 라벨의 대표작 두 곡을 통해,
🎼 작곡가로서의 서정과
🎼 편곡가로서의 구조 감각,
두 얼굴을 동시에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 (1899, 1910)
이 곡은 본래 피아노 독주곡으로 1899년에 작곡되었고, 1910년 라벨 자신이 관현악 버전으로 편곡하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제목은 “죽은 공주”를 위한 슬픔이 아니라, "16세기 궁정무용 파반느를 추던 한 왕녀의 환영”에 가깝습니다.
피아노 버전에서는 느린 템포 속에서 단정한 리듬과 절제된 화성이 서정적인 선율을 이끌어내고, 오케스트라 편곡에서는 호른과 플루트, 현악기의 조화로 그 서정을 더욱 부드럽고 따뜻하게 감쌉니다. 특히 마디 18~30 부근의 멜로디는 피아노에선 조심스러운 노래지만, 오케스트라에선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화처럼 다가옵니다.
🎧 Seong-Jin Cho - Ravel: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 (피아노 버전)
→ 절제된 아름다움, 정제된 감정을 담은 피아노 원곡 (피아니스트 조성진 연주, YouTube Deutsche Grammophon - DG 채널 제공)
🎧 Ravel,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 |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오케스트라 버전)
→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화 같은 오케스트라 버전 (지휘 김선욱 (Sunwook Kim),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연주, YouTube TomatoClassic 토마토클래식 채널 제공)
🖼 전람회의 그림
Pictures at an Exhibition – Ravel's Orchestration (1922)
이 곡은 라벨이 작곡한 작품이 아닙니다. 원곡은 무소륵스키가 남긴 피아노 독주곡(1874)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람회의 그림은 라벨이 1922년에 편곡한 관현악 버전이 사실상 표준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죠.
라벨은 이 작품에서 🎺 트럼펫, 🎷 색소폰, 🎻 현악기군, 🎶 퍼커션 등 관현악의 거의 모든 음색을 동원해 각 그림의 분위기와 리듬을 재해석했습니다.
예를 들어:
- ‘키에프의 대문’: 파이프 오르간처럼 울리는 금관의 겹음
- ‘카탈콤바’: 낮게 깔리는 현과 브라스의 죽음의 공간감
- ‘병아리들의 발레’: 목관과 피치카토로 그려낸 익살스럽고도 섬세한 춤
라벨은 타인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관현악 언어가 얼마나 정교하고 독립적인지를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 곡은 단지 편곡이 아니라, 재창조에 가까운 예술적 번역입니다.
🎧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M.Mussorgsky, Pictures at an Exhibition) (피아노 원곡)
(피아니스트 지용 연주, YouTube TV예술무대 채널 제공)
🎧 M. Mussorgsky / Pictures At An Exhibition (Orchestrated by M. Ravel) (오케스트라 편곡)
→ 다이내믹한 해석으로 라벨의 색채 감각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음 (정명훈 지휘 Myung-Whun Chung(Cond), YouTube KBS교향악단 채널 제공)
🎼 모리스 라벨, 작곡가인가 편곡가인가
이 질문은 어쩌면 의미 없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모리스 라벨의 진짜 정체성은 ‘청각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파반느》에서 그는 피아노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서정을 만들어냈고, 《전람회의 그림》에서는 타인의 음악을 자신보다 더 라벨답게 들리도록 만들었습니다.
마무리하며
모리스 라벨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그 어떤 악기보다 음색에 진심이었던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음악을 듣는다는 건, 단지 ‘곡’을 듣는 게 아니라 🎨 한 화가의 붓질을 귀로 따라가는 경험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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